호로고루는 무엇인가
아직은 겨울의 마지막을 붙들고 있는
봄의 문턱이라 그런지 바람에 약간의
찬기가 남아 있다.
임진강을 바라보이는 위치에 성을 쌓아
주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넓게 잔디를 깔아놓아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을 것 같다.
한 여름에 방문한다면 그늘이 없으니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양산이나 선글라스가
필수품으로 챙기면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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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
漣川 瓠蘆古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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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 전경
호로고루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 3리 일대에 소재하고 있다. 호로고루는 입지적인 측면에서, 북쪽은 크고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시계를 확보할 수 없는 반면, 남쪽은 두기진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임진강 남안의 넓은 지역을 관측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호로고루는 남쪽을 방어해야 하는 고구려의 입장에서 보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인 것이다.
이곳은 고구려가 평양지역에서 출발하여 남하할 때 개성-장단-고랑포를 통해 임진강을 건너는 것이 가장 단거리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호로고루는 해발 22~30m 정도의 구릉상에 축조된 성으로 삼각형 모양의 평면을 하고 있는데, 전체 둘레는 401m 정도이며, 전체면적은 2천 평 정도이다. 성벽은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 부분만 남북을 가로질러 협축식(夾築式) 성벽을 축조하였고, 나머지는 내탁하여 편축식(片築式)으로 축조하였는데, 높이는 대체로 4~5m를 나타내고 있다.
호로고루의 축조상태를 동벽에서 살펴보면 판축부(版築部)와 석축부(石築部), 보축부(補築部)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판축부는 성의 기단부 전체를 받치고 있다. 그리고 성벽의 중간 부분은 판축토를 중심으로 양쪽이 대칭을 이루는 석축부가 있다. 성 내부의 석축부는 외곽의 석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석재가 사용되고 있는 반면, 외부의 석축부는 두텁고 높게 쌓여 있다. 이와 같은 성벽 축조방법은 평양 대성산성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외부의 석축부 바깥에는 보축부가 있고, 보축부의 바깥쪽 기단부에는 다시 점토를 다져 놓은 상태이다.
동벽의 높이는 10m이고 하단부의 너비는 약 40m에 달하며, 전체 길이가 90m 정도이다. 성벽의 단면을 살펴보면 기저부 단면의 너비는 32m에 달하며, 단면부의 높이는 6m 정도이다. 성벽은 중간 부분의 사질 판축부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형이나 중간 부분이 서쪽으로 치우쳐진 상태이다. 성벽 중간의 사질 판축 부분은 상단의 너비가 3.6m, 하단은 4.6m를 나타내며, 판축부에서 석축(石築) 부분은 동쪽부가 6.4m, 서쪽부가 7.4m로 확인되고 있다. 성벽의 경사도는 내벽이 15˚, 외벽이 35˚의 경사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동벽 정상부의 경우 동사면이 40˚, 서사면이 30˚를 유지하고 있다.
동벽 내벽은 판축토 위에 20~30㎝, 30~40㎝ 크기의 현무암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석축의 너비는 8.5m 정도이다. 가운데 판축부는 바닥에서 1.2m까지는 0.1~0.5m 내외의 판축층이 이루어져 있으며, 그 상부에 회갈색 사질 점토층이 3m 높이로 구축되어 있다. 이 층에는 상당량의 고구려 토기 편이 혼입 되어 있는 상태이다. 외벽 석축부는 1.2m 높이의 판축토 위에 구축된 0.6~0.8m 두께의 갈색 점토층 상부에 현무암의 성석(城石)을 사용하여 거의 수직에 가깝게 12단 1.8m 높이로 축조하였다. 외벽을 이루고 있는 석축부의 너비는 7m이다. 이 외벽에 잇대어서 보축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체성벽의 기저부보다 약 1.5m 낮은 지점에서부터 축조되었다. 보축성 벽은 기저부에서 9단은 바른 층 쌓기를 하였는데, 아랫단과 윗단은 10~15㎝ 정도 퇴물림 쌓기를 하고 그 위층부터는 수직에 가까운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성벽 정상부 주변에는 고구려 토기 편을 비롯하여 삼국시대와 고려·조선시대의 각종 와편들이 산재되어 있다. 성벽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양상은, Ⅰ-1층과 Ⅰ-2층에는 원삼국시대 타날문토기 편이, Ⅰ-3층과 Ⅰ-4층 및 그 상층에서는 고구려 토기편이 여러 점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판축토 내부와 보축성벽 바깥쪽의 다짐토 내에서는 와편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다짐토 윗부분에서부터 고구려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 암키와편의 등문양은 승문(繩文)을 비롯하여 횡선문(橫線文), 격자문(格字文), 사격자문(斜格字文), 거치문(鋸齒文) 등 다양한 편이며 그 내부에는 모골과 포흔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호로고루에서는 2점의 목탄시료가 발견되어 그 분석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미국의 BETA연구소 및 서울대학교에 의뢰하였는데, 두 시료에 대한 분석결과 성내의 건물지 바닥에서 수습된 목탄의 보정연대 치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A.D. 430-620년, BETA연구소가 A.D.430-660년으로 거의 유사한 결과가 나왔다. 또 다른 시료는 동쪽 성벽의 남쪽 단면 동쪽 보축부분의 지표 하 1.4m 지점에서 수습된 것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결과는 A.D. 410-650년으로 나머지 두 자료의 결과와 유사하여 3건의 결과는 모두 이 지역을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다.
호로고루의 축조시기는 동벽을 축조하지 않았던 시기와 동벽을 축조한 이후의 시기로 구분되며, 그 구분 시점은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대의 어느 시점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호로고루 내에서는 크게 4 시기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원삼국시대의 타날문토기, 고구려유물, 신라·통일신라유물, 그리고 고려시대유물이 그것이다. 그중 원삼국시대의 유물은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호로고루가 성으로 기능한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 많은 양의 유물이 고구려 유물이고, 그다음이 신라와 통일신라의 유물이다. 고려시대 이후의 유물도 그렇게 많이 차지하지는 않는다. 이를 볼 때 고구려에 의하여 축조된 이 성은, 신라 문무왕 2년 김유신이 평양으로 군량미를 운반하고 돌아오는 길에 표로하(瓢瀘河) 부근에서 고구려군과 교전을 벌이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까지도 신라가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판단됨으로 7세기 후반에 가서야 신라에 의하여 지배되었고,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펌)
연천호로고루
경기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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